1510년(중종 5)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일본과의 교역이 허가된 3개의 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 사건.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고도 한다.

▶ 삼포
– 부산포(富山浦. 현 부산)
– 내이포(乃而浦. 현 경남 창원시 진해구)
– 염포(鹽浦: 현 울산의 방어진과 장생포 사이)

삼포에는 거류 왜인을 총괄하는 그들의 책임자가 있어 일정한 조직 체계 아래에서 활동하였다.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이들 조직체를 통해 공물로서 면포를 받아가는 일까지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세종 때부터 그들의 토지 경작에 대한 수세론(收稅論)이 논의되다가 1494년(성종 25)에 이르러 거류 왜인의 경전(耕田)에 대해 수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면세 혜택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책을 악용, 왜인들의 법규위반 사태가 빈번히 일어났고 연산군 때를 거치면서 그 도가 절정에 달하였다. 이에 1506년중종은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왜인에 대해 법규에 따라 엄한 통제를 가하였다.

이에 왜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조선인들과의 충돌이 잦게 되었다. 1510년 4월, 제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인 오바리시(大趙馬道)와 야쓰코(奴古守長) 등이 대마도주의 아들 소(宗盛弘)를 대장으로 삼아 4,000∼5,000의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을 공격하여 첨사(僉使) 이우증(李友曾)을 살해하였다.

또, 제포를 공격, 첨사 김세균(金世鈞)을 납치한 뒤 웅천과 동래를 포위, 공격하여 삼포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절도사(前節度使) 황형(黃衡)과 전방어사(前防禦使) 유담년(柳聃年)을 각각 경상좌·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로 보내어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 결과 소는 피살되고 삼포 거류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여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탔으며, 왜선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참획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참수된 왜인들의 무덤을 높이 쌓아 뒷날 입국하는 왜인들이 위구심(危懼心)을 가지도록 하였다.

왜란 진압의 공으로 황형 등 188명은 1등으로, 현감 백사반(白斯班) 등 326명은 2등으로, 갑사(甲士) 권영생(權永生) 등 359명은 3등으로, 모두 873명이 논공행상되었다. 삼포왜란을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어 통교가 끊겼다. 그리고 이 상태는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 국교를 다시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삼포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