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양반(兩班)과 양인(良人)의 중간신분계급층.

중인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중간신분층의 뜻으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조선 후기부터였다. 중인에는 두 가지 용례가 있는데, 하나는 서울의 중심가에 살던 역관(譯官)·의관(醫官)·산관(算官)·율관(律官)·음양관(陰陽官)·사자관(寫字官)·화원(?員)·역관(曆官) 등 기술관(技術官)을 총칭하는 협의의 중인이다. 다른 하나는 기술관뿐만 아니라 향리(鄕吏)·서리(胥吏)·서얼(庶蘖)·토관(土官)·장교(將校)·역리(驛吏)·우리(郵吏)·목자(牧子) 등 경외(京外)의 행정실무자들을 총칭하는 광의의 중인이다. 중인층은 조선시대의 다른 어떤 신분층보다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위로는 양반층과 비슷한 지위에 있는 축들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는 천인과 비슷한 지위를 가진 축들도 있다. 그러나 중인은 대체로 양반에는 미치지 못하고 양인보다는 우위에 있던 조선시대의 중간신분이라든가, 양반에서 도태되거나 양인에서 상승한 자들이라는 것은 공통점이 있다.

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