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청조(淸朝)의 발전된 문물제도와 학문을 수용하자고 주장한 실학의 한 학파.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北學派) 사상가들이 강조한 실학 이념. 백성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이롭게 쓰이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실천적인 학문의 내용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 말은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보인다. ‘이용’이란 백성의 쓰임에 편리한 것으로서 공작 기계나 유통 수단 등을 의미하고, ‘후생’은 의식(衣食) 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유학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경세제민을 통해 백성의 삶을 풍요롭고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을 정치의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못지 않게 경제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다. 공자(孔子)가 교육에 앞서 백성의 부서(富庶)를 말한 것이나 맹자(孟子)가 백성에게 항산(恒産)을 마련해 주는 것을 왕도 정치 실현의 기반으로 지적한 것은 모두 그 실례이다. 후대로 오면서 유학의 관심이 윤리적·도덕적인 정덕(正德)의 측면에 기울면서, 이른바 덕본재말(德本財末)·중의경리(重義輕利) 등의 의론이 나와 재물이나 이익을 경시하는 듯한 흐름이 생겨났다. 유학의 이러한 경향은 특히 성리학에 이르러 극대화되었는데,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기풍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그런 대로 생동감을 갖추고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 이상 현실 지도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형해화(形骸化)되어 갔다. 여기에서 성리학을 대신하여 구체적인 민생의 고통과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실학 사상이 대두된다. 이 실학의 흐름은 그 사상적인 경향에 따라 시대별로 보통 세 단계로 구분된다. 제1단계는 이수광(李?光)·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파다. 제2단계는 18세기 후반 중국 청나라의 문물에 대한 견식을 통해 서구 문화에까지 눈을 뜨게 된 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李德懋) 등 이른바 북학파로 불리는 이용후생학파다. 제3단계는 19세기 초반 중국 고증학(考證學)의 영향 아래 일어난 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 등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파다. 이 가운데 이용후생학파에는 앞에 적은 여러 학자 외에 이중환(李重煥)이나 유수원(柳壽垣) 및 정약용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용후생의 실천을 통하여 부국안민을 이룩하는 것이 그 시대의 급선무임을 주장하고, 구체적으로 그 이용후생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들이 제시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적 신분 질서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을 타파할 것과 능력에 따른 신분의 재편성, 보통 교육의 확대 등 사회 개혁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였다. 둘째, 봉건 지배 계급인 사(士)의 타성적인 계급 의식을 타파하고 공상(工商)으로의 전환을 통해 상(商)을 중심으로 한 국가 경제 체제를 확립하는 부국을 지향하였다. 국내의 경제 유통을 위한 용거(用車)·용선(用船)과 도로망의 정비 등을 제시하고, 국부(國富)의 증진을 위한 외국과의 교역을 강조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과 국민 경제를 통해 부국 강병과 이용 후생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농업·공업·방직·군사·의료·천문·수학 등 각 분야에서 선진적 기술의 습득이 필수적임을 주장하였다. 기술은 역사의 변천에 따라 진보한다는 의식과 청나라의 문물 제도를 통해 서양의 기술을 직접 체험하고,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비록 그 법이 이적(夷狄)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성인이 그것을 선택할 것”이라며, 중국과 서양의 선진적 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보였다. 넷째,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선진적인 것으로 보고 적극 수용함으로써 북학파로 불리고 스스로도 그렇게 자처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모화론자(慕華論者)들과는 달리 강렬한 민족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이익·안정복(安鼎福) 이래 실학 사상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갖가지 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던 당시 사회에 대한

북학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