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유영석(柳永錫)이 서울에 설립한 신문사. 당시 발간되고 있던 ≪협셩회회보≫를 개제하여 창간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이다. 사장에는 양홍묵(梁鴻默), 기재원(記載員:지금의 기자)에 이승만(李承晩)·최정식(崔廷植), 회계에 유영석(柳永錫) 등이 참여하였다. 원래 ≪협셩회회보≫는 배재학당 구내에서 발행하였으나 ≪?일신문≫으로 발전한 뒤에는 사옥을 남대문 안, 전(前) 싸전(쌀과 그 밖의 곡식을 파는 가게)도가로 정하고 훈동에 있던 이문사(以文社)의 활판을 옮겨다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1898년 3월 19일에 열린 협성회 통상회 석상에서 회보의 주간 발행이 신문으로서의 현실성을 추구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고 주간에서 일간으로 고쳐 발행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발간되었다. 이 신문은 창간사를 통해, 조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문명진보의 큰 기초적 구실을 수행할 것을 다짐하였다. 구독료는 1부에 엽전 4푼, 1개월에 엽(葉) 7돈이었으며 발행부수는 대체로 1,000여 부 내외였다. 편집체재는 주간지일 때와 마찬가지로 4면제로, 1면 2단형식을 취하였고, 1면에 논설, 2면에 내보·관보·잡보, 3면에 외국통신과 전보, 4면에 협성회의 회중잡보(會中雜報)와 광고 등을 실었다. 순한글체의 언문일치문장을 사용함으로써 한글신문시대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신문은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선구적인 구실을 하였다. 1898년 5월 16일자(제32호) 1면에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이 대한제국 정부에 대하여 토지와 탄광에 관한 이권을 요구해 온 외교문서를 폭로하였다. 그것은 그 해 5월 7일자로 외부대신 조병직(趙秉稷)에게 보낸 외교문서 제32호로, 토지구매에 협력을 요구한 러시아의 외교문서와, 프랑스가 5월 5일자로 평양 탄광의 조속한 확보를 재촉한 외교문서였다. 이는 당시 성행했던 열강의 각종 이권쟁탈에 대하여 일격을 가한 것으로, 이에 대한 열강세력의 항의와 정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강력한 논조를 폈다. 그러나 주간으로 발행하던 때도 이미 매달 많은 재정적 결손을 보았던 터라 일간제가 되면서는 학생들만의 능력으로 신문경영을 지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외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야 했는데, 이는 학생인 정회원 외에 외부 일반인들을 찬성회원으로 영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유영석이 외부 찬조인사를 맞아들이는 데 많은 활약을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정문제와 그 운영문제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4개월 뒤인 1898년 7월 상순에는 신문 운영진이 두 갈래로 분열되고, 7월 9일부터 10일간 휴간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협성회의 전통적인 권위를 옹호하는 일파와 재정보조를 하는 외부 일반인의 운영권 옹호를 주장하는 일파로 나뉘어 분규를 거듭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승만·유영석·최정식 등이 해임당했으나 재정난은 여전히 계속되어 결국 1899년 4월 4일자(제279호)를 종간호로 내고 1년 3개월 만에 그 자취를 감추었다. 이 신문의 기재 및 기계는 상무회사(商務會社)가 인수하여 ≪상무총보 商務總報≫를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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