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만주에 설립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한 민족계 학교.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경상남도 밀양에 살던 대종교인 윤세용(尹世茸)은 동생 윤세복(尹世復)과 국외 망명을 결정한 뒤, 독립자금을 가지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2년 이후, 만주 환인현(桓仁縣) 성내(城內)에 이주한 윤세용·윤세복 형제는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심신이 단련된 인재의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아 동창학교를 짓고 6개월 뒤 개교하였다. 우리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국권 회복을 기약한다는 취지에서 학교 이름을 ‘동창(東昌)’이라 정하였다. 초대 교장에는 윤세용이 취임하였으며 교사도 겸직하였다. 당시의 교사는 윤세용 외에 윤세복·이원식(李元植)·김형(金衡)·이극로(李克魯)·이시열(李時悅)·김규환(金奎煥) 등이 있었으며, 학생은 100여 명으로 대부분 독립투사의 자제들이었다. 교과서는 단군사상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삼아, 역사·국어·한문·지리 등을 가르쳤으며, 교내에 기숙사도 설치했다. 그러나 이주한 동포들의 생활이 매우 곤궁하여 기숙사비와 피복비도 학교측에서 지급해 줄 정도였다. 이 사실을 안 일본영사관에서는 중국 관헌에게 폐교령을 내리도록 압력을 넣어, 설립된 지 3년 만에 폐교되고 학생과 교사들도 환인현을 떠나야 했다. 당시 수업연한이 4년이었으므로 한 명의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하였으나, 독립운동의 정신적 맥락을 함께 한 학교로서 민족 교육사적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동창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