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4년(인조 2) 이괄이 주동이 되어 평안도 영변에서 일으킨 반란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 ?~1634)⋅기익헌(奇益獻, ?~?), 구성 부사 한명련(韓明璉, ?~1624)과 함께 가까운 병영의 군사 1만여 명과 투항한 왜병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 순천⋅자산⋅중화, 황해도 수안⋅황주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이 합세하여 저탄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 개성⋅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 이하 대신들은 공주로 피난을 갔고 이괄 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괄은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이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 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길마재에서 대파하였다.
이괄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경기도 광주로 달아났으나 부대장 정충신(鄭忠信, 1576~1636) 등이 이끄는 관군의 추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괄이 경기도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그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이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이괄 등의 수급(首級)이 공주의 행재(行在)에 이른 뒤 인조는 환도하였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南以興, 1576~1627) 등 32명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고 난의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왕이 서울을 떠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켰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韓潤, ?~?) 등이 후금으로 도망쳐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고 남침을 종용하였다.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