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왕이며 인조의 장자, 효종의 형이며, 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강씨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1644년 청나라 도르곤[多爾袞]의 원정군을 따라 베이징[北京]에 들어갔다. 소현세자는 베이징에 머문지 두어달이 지난 1644년 11월 26일 볼모에서 풀려났으며 1645년 2월 18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같이 볼모로 잡혀갔던 동생 봉림대군에 비해 청나라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새로운 문물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신봉하였던 성리학이 이미 낡은 사상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에게는 청나라와 가까운 인물로 인식되었고 서인 세력들에게는 극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결국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삼아 인조의 냉대를 받았고 급기야는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소현세자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