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붕당의 한 정파. 북인(北人)은 남인과 함께 동인(東人)에서 분파된 붕당(朋黨)의 한 정파이다. 갈라지게 된 동기는 정철(鄭澈)의 건저의 사건(建儲議事件)을 계기로 동인 내부에서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대립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이는 주된 동기일 뿐, 전체적인 요인은 아니다.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주요인이라면, 이를 발생시킨 것은 사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전랑(銓?) 천거 문제를 둘러싼 이산해(李山海)와 유성룡(柳成龍)과의 사적인 알력, 이발(李潑)과 유성룡과의 사적인 불화, 그리고 이발과 우성전(禹性傳)과의 평양기생 문제를 계기로 발생한 사감에 의한 분파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감과 함께 세자책봉 문제로 문책을 받은 서인 정철에 대해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는 파와 우성전을 중심으로 한 온건론을 펴는 파의 대립 등이 복합되어 분당 작용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인의 남북 분당은 집권당 안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흔히 벌이는 정치 현상으로 간주된다. 우성전과 유성룡을 추종하는 자들을 남인이라고 칭한 데 대해 이발과 이산해를 중심으로 하는 일파를 북인이라 하였다. 이 명칭의 유래는 이발의 집이 서울 북악 밑에 있었고, 이산해의 집은 한강 이북에 있었기 때문이다. 분당 초기 북인은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교우 관계를 가졌거나, 그 문하에 출입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영남학파 중에서도 조식(曺植)의 문하생들이 그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분파 당시의 북인은 아래 [표]와 같다. 동인에서 분파된 북인은 정권을 잡은 뒤, 다시 분당되었다. 즉, 1599년(선조 32)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자 당시 정랑으로 있었던 남이공(南以恭)이 이에 반대하여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다시 갈라졌다. 이산해와 홍여순이 영도하는 당을 대북이라 하였다. 기자헌(奇自獻)·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허균(許筠)·한찬남(韓纘男)·이명(李溟)·이성(李惺)·백대형(白大珩)·구의강(具義剛)·홍식(洪湜)·유몽인(柳夢寅)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소북은 남이공과 김신국(金藎國)을 수령으로 하였다. 유영경(柳永慶)·유희분(柳希奮)·이경전(李慶全)·이유효(李維孝)·이효원(李茸元)·박이서(朴紛敍)·성준구(成俊耉) 등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대북과 소북으로 갈린 뒤, 북인의 대부분은 소북을 몰아내고 선조 말에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 정권을 굳혔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골북(骨北)과 홍여순·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육북(肉北)으로 또다시 분파되었다. 여기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반대하는 중북(中北)이 탄생하였다. 유몽인을 수령으로 한 중북은 기자헌·정은·정창연(鄭昌衍)·이경전·이명·박승종(朴承宗) 등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한편, 대북에 밀려난 소북은 영수 격인 유영경이 영의정에 올라 한때 득세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죄를 대북 정인홍에게 전가해 화를 면하는 듯했다. 이후 광해군의 등극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에 소북은 영수 격인 남이공과 유영경 사이에 틈이 벌어져 다시 분당되었다. 전자를 중심으로 한 파당을 청소북(淸小北) 또는 남당(南黨)이라 하고, 후자를 중심으로 하는 당을 탁소북(濁小北) 또는 유당(柳黨)이라고 하였다. 선조 말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대는 여러 갈래로 분당, 대립된 대북 세력이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대북의 전성기는 인조반정으로 끝나고, 소북은 일부가 서인·남인에 흡수되었다. 그리하여 인조 때는 좌의정을 역임한 바 있는 남이웅(南以雄)이 그 잔존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잔여 세력도 효종·현종 때에 와서 남인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리고 경종 이후로는 남인과 운명을 같이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