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가 이루어지도록 중간자 역할을 했던 전문적인 상인.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명칭이며, ‘부보상(負褓商)’이라고도 한다. 보상은 주로 기술적으로 발달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비싼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한 데 반하여, 부상은 조잡하고 유치한 일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위주로 하였다. 또한 보상은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고, 부상은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이에 따라 보상을 ‘봇짐장수’, 부상을 ‘등짐장수’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대개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표준삼아 형성되어 있는 시장망을 돌면서 각지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다. 그러나 대부상·대보상들은 수운(水運)과 우마차로 다량의 상품을 일시에 운반, 판매하기도 하였다. 부상의 기원은 고대사회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사회의 물품 운반수단은 소와 말도 있었지만 주로 사람의 머리나 등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이다. 부상단(負商團)이 조직된 것은 조선 초로, 이에 대해서는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개국에 공헌했기 때문에 그 조직을 허용했다는 설과, 이와는 달리 상류 계층과 무뢰한의 탐욕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부상단은 적어도 조선 초에 조직되어 같은 마음으로 결속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뒤에도 조정에서는 국가 대사나 국난 위기 때 이들을 수시로 사역하였다. 한편, 보상이 언제부터 조직을 갖게 되었는지는 속단하기 어려우나, 그것이 전국적인 조직을 갖게 된 것은 1879년(고종 19) 9월에 발표된 <한성부완문 漢城府完文>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의하면, 이전부터 지역적으로 각기 정해진 규율과 두령인 접장(接長)의 소임이 있어서 군료(群僚)를 통솔해 왔으며, 산재한 조직을 전국적인 상단(商團)으로 묶어 소규모 자본의 행상을 규합했음을 알 수 있다. 보상단은 동료간의 결속을 다지고 무뢰한과 아전들에 의한 폐해를 금함으로써 상권의 확립을 기하였다. 한성부에서 8도의 도접장(都接長)을 차출하면 일종의 신분증인 도서(圖書 또는 驗標라고도 함)를 함께 발급함으로써 보상의 신분을 보장하였다. 부상과 보상은 각각 별개의 행상조합으로 성장하였으나, 1883년에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하여 보상과 부상을 완전 합동하게 하였다. 1885년에는 다시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부상을 좌단(左團, 左社), 보상을 우단(右團, 右社)으로 구별하고, 역원(役員)만은 상리국에 통합, 단일화시켰다. 1882년 6월에는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반발한 민영익(閔泳翊)이 경기도와 강원도의 보부상들을 이끌고 서울의 흥인문(興仁門:지금의 동대문)에까지 도달하여 장차 서울로 침입한다는 소문 때문에 성내가 크게 혼란스러웠을 때, 백성들에게 임의로 무기를 나누어 주고 방위하게 하여 무사했다는 사실도 있다. 그래서 같은 해 같은 달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소계(所啓)에 따라 각 도 관찰사로 하여금 관하에 있는 부상들의 거주와 이동을 철저히 검속하고, 삼군부(三軍府)에서 통할하도록 하였다. 또 같은 해 7월에는 부상들을 군대 편성에서 해체시켜 모두 향리에 돌아가 본래의 상업 행위를 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러나 1883년 삼군부가 없어지자 보부상단을 한데 묶어 군국아문(軍國衙門)에 부속시켰다가, 다시 1885년 혜상공국을 상리국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부상을 좌단, 보상을 우단으로 편성하였고, 1894년에는 부상과 보상을 농상아문(農商衙門)의 관할하에 소속시켰다. 한편,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보부상단은 또 한번 동원되어 무력활동을 벌였다. 동학농민운동의 황토현전투에서 전주감영의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송봉암(宋鳳岩) 등이 영병(營兵) 250인과 보부상 1,000여 인을 이끌고 동학군과 격전을 벌인 이후, 보부상과 동학군은 계속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보부상군의 주축은 충청우도(忠淸右道) 저산팔구(苧産八區)의 부상과 보상들이었으며, 그 중심 인물은 임천과 홍

보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