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19년 6월 서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여성운동단체. [설명]1919년 3월 중순, 오현주(吳玄洲)·오현관(吳玄觀)·이정숙(李貞淑) 등이 3·1운동 투옥지사에 대한 옥바라지를 목적으로 혈성단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를 조직·활동하였다. 4월에는 최숙자(崔淑子)·김희옥(金熙玉) 등이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를 조직하였다. 두 부인회는 그 해 6월 임시정부에 대한 군자금 지원을 위해 통합하였다. 지방에 다수의 지부까지 두었으나 활약이 부진하자, 9월에 김마리아(金瑪利亞)와 간부들은 발전적 해체를 통한 재조직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에 17명이 김마리아 거처인 천교장 2층에서 장시간의 비밀회합 끝에 새로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탄생시킨다. 애국부인회는 서울에 본부를, 지방에 지부를 조직하고 본부 부서를 대폭 개편하였다. 종래의 애국부인회는 군자금 모금과 송달을 최대 임무로 여겨 재무부장·재무주임의 직을 두어 주력하였다. 그러나 새로 탄생된 애국부인회에는 종래에 없던 적십자부장과 결사부장을 각 2명씩 두어 항일독립전쟁에 임할 철저한 자세를 가졌다. 본부 부서에는 회장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李惠卿), 총무 황에스터(黃愛施德), 재무장 장선희(張善禧), 적십자부장 이정숙·윤진수(尹進遂), 결사부장(決死部長) 백신영(白信永)·이성완(李誠完), 교제부장 오현주, 서기 신의경(辛義卿), 부서기 김영순(金英順) 등이었다. 지부는 서울·대구·부산·흥수원·재령·진남포·원산·기장·영천·진주·청주·전주·군산·황주·평양 등에 설치하고, 각 지부에도 결사대를 두었다. 애국부인회는 부인들을 각성시켜 국권과 인권의 회복을 목표로 하였으며, 국민된 의무를 다하고 공화국 국헌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애국부인회는 민주주의 이념의 확고한 기초 위에서 항일여성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활동한 지 1∼2개월에 약 6,000원이라는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상해로 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두 달 만에 백 수십 명의 회원을 규합하였는데, 교회지도급 여성과 여교사·간호원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 중 간호원이 가장 많았던 것은 독립전쟁에서 백의천사로 활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애국부인회 활동이 활발히 추진되던 1919년 11월말 경 한 간부의 배신으로 서울과 지방의 간부 및 회원들이 경상북도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일제히 체포되어 대구경찰에서 취조를 받았다. 취조를 받은 사람은 52명이었으며, 그 중 43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김마리아 등 9명만 기소되었다. 이들은 취조 심문 중 “한국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연호는 모르고 서력만 안다.”라고 답변하는 등 철저한 항일독립정신의 투지를 보였다. 이들의 최종 형량은, 김마리아·황에스터는 각 3년, 이정숙·장선희·김영순은 각 2년, 유인경(兪仁卿)·이혜경·신의경·백신영은 각 1년이었다.

대한애국부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