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조직된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으로, 그 기구를 발전적인 차원에서 해체하며, 나아가 조직을 확충하고 더욱 튼튼하게 하기 위해 1940년 10월 결성되었다. 1940년 8월, 일본의 제2차 고노에(近衛文?) 내각은 동아신질서건설 방침을 국책으로 천명하면서, 그 구체화 방책으로 이른바 신체제운동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백인제패의 세계 질서를 대신할 일본 중심의 동아블럭 건설을 위해서 천황귀일(天皇歸一)의 정치와 우선적 전체주의 체제를 확립하려는 운동이며, 만민익찬(萬民翼贊:만백성이 천황을 도와서 봉사한다.)의 국가중심주의체제를 완성하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 실행기관으로 국민정신총동원중앙연맹을 해소, 재조직한 것이 일본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이다. 조선은 정치적 권리 능력은 없고 국민적 협력만 요구되는 처지였기 때문에 ‘대정익찬회 조선지부’가 아니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되었다. 이 연맹은 지도조직·중앙조직·지방조직의 3단계 조직으로 나누어졌다. 지도조직은 총독부 안에 특설된 국민총력운동 지도위원회로서, 위원장인 정무총감 이하가 총력운동의 최고 기본방침을 정하였다. 중앙조직은 조선의 모든 단체와 개인을 구성원으로 삼되, 총재에 조선총독, 부총재에 정무총감을 앉혔다. 고문·이사·참여(參與)·참사(參事)·평의원이 실천 방책의 심의·건의 또는 자문에 응답하고, 사무국이 실무 및 실천 방면을 통할하였다. 지방조직은 도연맹, 부·군·도·읍·면연맹, 정(町)·이(里)·부락연맹과 말단 세포조직인 애국반으로 구성되며, 개개인은 대략 10호 단위로 편성되는 애국반에 참가함으로써 기층조직을 형성하였다. 중앙조직인 국민총력 조선연맹임원은 1940년 10월 현재 총재·부총재인 총독·정무총감 밑에 고문으로 나카무라(中 村孝太郞:조선군사령관)·쓰카하라(塚原二四三:진해요항부사령관)·시치다(七田一郞:제20사단장)·고쓰키(上月良夫:제19사단장)·가와시마(川島義之:전 육군대신)·시노다(篠田治策:경성제국대학 총장)·윤덕영(尹德榮:중추원 부의장)이 임명되었다. 또한 참여에 이항구(李恒九:이왕직장관) 등 9명, 이사에 정교원(鄭僑源:도지사) 등 46명, 참사에 계광순(桂珖淳:참여관) 등 68명, 평의원에 장직상(張稷相:중추 원참의) 등 50명으로 제1급 친일 거두와 침략 거두들이 모두 참가하였다. 이 연맹의 활동은 이른바 신체제운동과 관련된 전시국민훈련 및 국민 동원의 모든 부문에 걸쳤다. 그 주요한 몇 부문을 요약하면, ① 기관지 『국민총력』의 발간, 라디오 프로 ‘국민총력의 시간’ 운영, 출판물 『총력총서(總力叢書)』 발간과 강연회·좌담회를 통한 황민사상 및 황민생활 고취, ② 총력연맹 문화부를 통한 황민적 문화 동원, ③ 각 직장 총력연맹을 통한 황민운동과 황민 동원, ④ 지역, 직역(職域)연맹과 애국반을 통한 공출, 물자 절약, 징병·징용 독려, ⑤ 신궁참배단·병영견학단·황군위문단 파견과 대전과(大戰果) 감사 국민총진격대회 등의 개최를 통한 전쟁의식 고취 등이다. 1945년 7월 8일 본토 결전에 대비한 조선국민의용대가 조직됨으로써 같은 달 10일 여기에 통합·흡수되면서 해체되었다.

국민총력 조선연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