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에 영국 구세군사관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 한국 이름 허가두(許嘉斗)) 정령(正領)이 창설한 구세군한국본부. 정식 명칭은 구세군대한본영(救世軍大韓本營)이다. 한국의 구세군은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1907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선에도 구세군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호가드를 한국 개척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호가드는 서울에 부임하여 서대문구 평동에 본부를 정하고 선교를 시작했다. 호가드 정령의 재임기간 8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 78개소를 개척하였고, 1925년에는 영문 170개소, 사관 218명, 평신도 9,000명으로 그 교세가 늘어났다. 1909년에 창간호를 낸 『구세신문(救世新聞)』은 여성교육, 구습타파, 계몽운동, 농사교육, 성경교육, 한글사용, 금주운동 등을 펼쳤다. 1910년에는 사관 양성을 위한 성경대학(지금의 구세군사관학교)을 설립했다. 또 1915년에는 종로구 신문로에 본영(本營)을 세웠으며, 1916년에는 일종의 통신교육제도인 영학생(營學生)제도를 도입했고, 1917년에는 사관부인과 전도부인 양성제도를 마련했다. 한편, 1916년 29명의 걸인 아동을 돌보는 ‘남자실업관’(서울후생학원)을 시작으로 사회사업에 뛰어들아. 빈민숙박사업, 여자육아원(혜천원), 여자부양소(서울여자관) 등을 신설하고, 각종 재해구제 및 태풍수해 구제, 지붕개량사업, 급식사업, 의료선교사업 등을 벌였으며, 이를 위해 1928년 자선냄비를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한동안 교세가 약해지는 듯하였으나, 광복 후 활발한 활동으로 다시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본영을 옮기고 피난민을 위한 급식사업, 구호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때 많은 사관들이 순교, 또는 피살되거나 납북당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1960년대 현재의 신문로(新門路) 구세군회관을 신축하고, 1970년대 한국인 사령관 전용섭(全龍涉)이 취임하면서 한국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과 개척운동 및 자급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85년 과천으로 구세군사관학교를 이전하고, 1987년 사관연장교육으로 ‘구세군사관학교’를 창설하였다. 1989년 전국 구세군 정교연합회를 발족하고, 1996년 평신도 지도자 육성을 위한 ‘권역별 수련원’을 개설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58-1번지에 있다.

구세군